정치894년 2월(음력)
최치원의 시무 10여 조
6두품 출신 학자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올렸다. 개혁안은 받아들여졌으나 진골 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Chae Yong-shin · Public domain · 원본
최치원은 12세에 당에 유학해 874년 외국인을 위한 과거인 빈공과에 급제했고, 황소의 난 때 지은 토황소격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885년 돌아와 개혁을 꿈꾸었으나, 6두품은 아찬(6관등)까지밖에 오를 수 없는 골품제의 벽에 막혔다. 시무 10여 조를 올려 아찬이 되었으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 해인사 등지에 숨어 살았다.
그의 글은 계원필경(당에서 지은 글 모음)과 4산 비명에 전한다. 신라 말 6두품 지식인들은 골품제를 비판하며 호족과 손잡았고, 최승우는 후백제로, 최언위는 고려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