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
6두품 출신의 학자.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고 토황소격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돌아와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올렸다. 계원필경을 남겼다
12세에 당에 유학해 874년 빈공과에 급제했고, 황소의 난 때 토황소격문을 지었다. 885년 돌아왔으나 6두품은 아찬까지밖에 오를 수 없는 골품제의 벽에 막혔다. 894년 시무 10여 조를 올려 아찬이 되었으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 해인사 등지에 숨어 살았다. 당에서 지은 글을 모은 계원필경과 4산 비명이 전하며, 난랑비 서문에서 유·불·선을 아우르는 우리 고유의 "풍류"를 말했다. 고려 현종 때 문창후로 추봉되어 문묘에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