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1915년 1월 18일 – 5월 25일

일본의 21개조 요구

다른 이름: 21개조 요구, 대중국 21개조 요구

제1차 세계 대전 중 산둥의 독일 조차지를 빼앗은 일본이 위안스카이 정부에 산둥·남만주의 이권 등 21개 조항을 요구해 대부분을 받아들이게 했다.

21개조 요구에 따른 조약에 서명한 뒤의 중국·일본 대표 — 1915년
21개조 요구에 따른 조약에 서명한 뒤의 중국·일본 대표 — 1915년

작자 미상 · CC BY-SA 4.0 · 원본

1914년 8월 일본은 영일 동맹을 내세워 독일에 선전 포고하고 11월 칭다오와 산둥의 독일 이권을 차지했다. 유럽 열강이 전쟁에 묶인 틈을 타 1915년 1월 오쿠마 내각은 위안스카이에게 산둥의 독일 권익 계승, 뤼순·다롄과 남만주 철도 조차 기한 연장, 한예핑 공사의 공동 경영 등을 요구했다. 중국 정부에 일본인 고문을 두게 하는 제5호 조항까지 들어 있었다.

협상이 늘어지자 일본은 5월 7일 최후통첩을 보냈고, 위안스카이 정부는 제5호를 뺀 대부분을 5월 9일 받아들였다. 중국 사람들은 이날을 "국치일"로 부르며 일본 상품 배척 운동을 벌였다.

21개조 요구는 중국의 반일 민족주의를 키운 출발점이 되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가 산둥 이권을 일본에 넘기기로 하자 이 불만이 5·4 운동으로 터졌고, 산둥은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야 중국에 돌아갔다.

지도에서 보기

1915년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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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라와 지도자
일본 · 침략국 — 다이쇼 일왕
중화민국 · 피침국
관련 장소
베이징

관련 인물

  • 위안스카이1859년 – 1916년

    관련자 · 청 말의 북양군 실력자로, 임오군란 뒤 조선에 머물며 내정에 간섭했다. 신해혁명 때 청 황제를 퇴위시키고 중화민국 대총통이 되었으나 독재 끝에 황제가 되려다 실패했다

앞뒤 사건

이전 사건
1915년 박은식의 "한국통사"
이후 사건
1915년 신문화 운동

이 사건이 든 테마

  •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주의1912년 – 1949년

    신해혁명으로 선 중화민국이 군벌 분열·5·4 운동·국공 합작과 북벌을 거쳐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국공 내전으로 갈라진 시대 —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에서 만주 사변·군부 쿠데타를 거쳐 중일 전쟁과 대동아 공영권으로 치달았고, 식민지 한국은 3·1 운동과 무장 독립 투쟁으로 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