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1945년 11월 23일

임시 정부 요인의 환국

다른 이름: 임시 정부 환국, 김구 귀국

광복 석 달 뒤인 1945년 11월 23일, 김구 등 임시 정부 요인 15명이 미군 비행기로 김포 비행장에 돌아왔다. 미군정이 임시 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아, 그들은 개인 자격으로 고국 땅을 밟아야 했다.

환국을 앞둔 임시 정부 요인들의 기념 사진 — 1945년 11월 3일 충칭
환국을 앞둔 임시 정부 요인들의 기념 사진 — 1945년 11월 3일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 국사편찬위원회 · Public domain · 원본

1945년 8월 15일 광복 소식은 충칭에도 닿았지만, 국내 진공 작전을 눈앞에 두었던 김구는 "우리가 이 전쟁에서 한 일이 없어 장래 국제 사회에서 발언권이 약하리라"며 안타까워했다. 38도선 남쪽을 맡은 미군정은 임시 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개인 자격으로만 들어오게 했다.

11월 5일 충칭을 떠나 상하이에 머문 요인들은, 11월 23일 김구·김규식·이시영 등 15명이 첫 비행기로 김포 비행장에 내렸고, 12월 2일 조소앙·홍진 등 23명이 두 번째로 돌아왔다(군산을 거쳐). 상하이에서 임시 정부가 세워진 지 26년 만이었다. 경교장에 머문 김구는 이후 신탁 통치 반대 운동과 남북 협상에 나섰다.

지도에서 보기

1945년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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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라와 지도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 — 주석 김구
관련 장소
김포 비행장, 충칭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

관련 인물

  • 김구1876년 – 1949년

    핵심 인물 · 호는 백범. 한인 애국단을 만들고 임시 정부 주석으로 한국광복군을 이끌었다. "백범일지"

  • 김규식1881년 – 1950년

    참여자 · 신한 청년당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갔다. 민족 혁명당에 참여했고 임시 정부 부주석을 지냈다

  • 이시영1869년 – 1953년

    참여자 · 이회영의 아우. 여섯 형제와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 강습소를 세우고, 임시 정부 법무·재무총장을 거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었다

  • 조소앙1887년 – 1958년

    참여자 ·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말한 삼균주의를 세웠다. 대한민국 건국 강령의 바탕이 되었다

앞뒤 사건

이전 사건
1945년 미군정 실시
이후 사건
1945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이 사건이 든 테마

  • 대한민국 임시 정부1919년 – 1945년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1919년부터 1945년까지 — 수립과 위기, 한인 애국단의 의거, 중국 대륙을 옮겨 다닌 피란길, 한국광복군과 환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