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 정부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1919년부터 1945년까지 — 수립과 위기, 한인 애국단의 의거, 중국 대륙을 옮겨 다닌 피란길, 한국광복군과 환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 국사편찬위원회 · Public domain · 원본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1919년부터 1945년까지 — 수립과 위기, 한인 애국단의 의거, 중국 대륙을 옮겨 다닌 피란길, 한국광복군과 환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 국사편찬위원회 · Public domain · 원본
1919년 3월 1일, 독립 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3·1 운동 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민주 공화제를 채택한 첫 정부로, 9월에 여러 임시 정부를 하나로 합쳤다.
임시 정부의 진로를 놓고 국내외 독립운동 대표들이 상하이에서 회의를 열었다. 창조파와 개조파가 맞서 결렬되었다.
침체에 빠진 임시 정부를 되살리려고 김구가 상하이에서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의열 투쟁을 벌였다.
한인 애국단원 이봉창이 도쿄 사쿠라다몬 앞에서 일왕이 탄 마차 행렬에 폭탄을 던졌다. 일왕을 죽이지는 못했으나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한인 애국단원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의 일왕 생일 겸 상하이 사변 승리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죽이고 다치게 했다.
윤봉길 의거로 일본의 추적을 받게 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32년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자리 잡았다. 8년 동안 중국 대륙을 옮겨 다니면서도 정부를 이어 갔다.
1938년 5월 창사 남목청에서 독립운동 세 정당의 통합을 논의하던 자리에 조선 혁명당원 이운환이 총을 쏘아, 김구가 가슴에 총탄을 맞고 크게 다쳤다. 김구는 살아났지만 총알은 평생 몸에 남았다.
충칭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총사령관은 지청천이었고, 1942년 조선 의용대가 합류했다.
임시 정부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광복 뒤 세울 나라의 모습을 밝힌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해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일본과 독일에 선전 포고했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싸워 광복을 스스로 이루려는 뜻이었다.
미국·영국·중국 정상이 카이로에서 회담하고,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시키기로 한 선언을 발표했다.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처음 약속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한국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왔다.
광복 석 달 뒤인 1945년 11월 23일, 김구 등 임시 정부 요인 15명이 미군 비행기로 김포 비행장에 돌아왔다. 미군정이 임시 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아, 그들은 개인 자격으로 고국 땅을 밟아야 했다.
한국광복군이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손잡고 특수 훈련을 받으며 국내로 들어갈 작전을 준비했다. 일본이 먼저 항복해 실행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