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북로남왜
다른 이름: 북로남왜, 경술의 변, 가정 왜구
16세기 중엽 명은 북쪽에서는 알탄 칸이 이끄는 몽골의 침입에, 남쪽 바다에서는 밀무역 상인과 섞인 왜구의 약탈에 한꺼번에 시달렸다. 명은 1570년 무렵 해금을 풀고 몽골과 화의를 맺어 겨우 숨을 돌렸다.

Henry Charles Seppings Wright · Public domain · 원본
명은 북쪽의 몽골을 막으려 만리장성을 고쳐 쌓고, 바다에서는 해금으로 민간의 해외 무역을 막았다. 16세기 중엽 가정제 때 두 방향의 위협이 한꺼번에 커졌는데, 이를 북로남왜(北虜南倭)라 한다. 북쪽에서는 몽골 투메트부의 알탄 칸이 명에 교역(마시)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해마다 장성을 넘었고, 1550년(경술년)에는 베이징 성 밖까지 몰려와 약탈했다(경술의 변).
남쪽에서는 해금을 어기고 밀무역을 하던 중국 상인 무리와 일본·포르투갈 상인이 뒤섞인 후기 왜구가 저장·푸젠 해안을 휩쓸었다. 무리의 다수는 중국인이었고, 우두머리 왕직은 일본 규슈의 히라도를 근거지로 삼았다. 척계광은 의용병을 길러 원앙진 같은 전술로 1560년대 초 왜구를 크게 무찔렀고, 그 경험을 병서 『기효신서』에 담았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전해져 훈련도감의 삼수병을 기르는 데 쓰였다.
명은 막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1567년 무렵 해금을 풀어 푸젠의 월항(해징)에서 민간의 동남아시아 무역을 허락했고, 1571년 알탄 칸을 순의왕에 봉하고 국경에 시장을 열었다(융경 화의). 남북의 긴장은 누그러졌으나 국방비는 명의 재정을 무겁게 짓눌렀다. 같은 때 조선도 삼포왜란(1510)·을묘왜변(1555)으로 왜구에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