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정변
다른 이름: 기상정변, 북경정변
1861년 함풍제가 러허에서 죽자 여섯 살 동치제를 대신해 숙순 등 여덟 대신이 정사를 맡았다. 11월 두 황태후(동태후·서태후)가 공친왕과 손잡고 이들을 몰아내고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영·프 연합군을 피해 러허의 피서산장으로 간 함풍제는 베이징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861년 8월 그곳에서 죽었다. 여섯 살 아들 재순이 뒤를 잇고, 함풍제가 남긴 뜻에 따라 숙순 등 여덟 대신이 어린 황제를 돕기로 했다.
그러나 황제의 생모 서태후(자희)와 황후였던 동태후(자안)는 베이징에서 외국과 협상을 이끈 공친왕과 손을 잡았다. 11월 황제의 관을 모시고 베이징에 돌아온 두 태후는 여덟 대신을 체포해 숙순을 처형하고, 발을 드리운 채 정사를 듣는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공친왕은 의정왕이 되었고, 새 연호는 「함께 다스린다」는 뜻의 동치(同治)로 정했다.
공친왕은 그해 초 세운 총리각국사무아문에서 외교를 맡고, 쩡궈판·리훙장 같은 한인 관료와 함께 양무운동을 이끌었다. 서태후는 이로부터 1908년 죽을 때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청의 실권을 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