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분쟁1019년

귀주대첩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의 10만 대군을 크게 무찔렀다.

낙성대 삼층 석탑 — 강감찬이 태어난 곳을 기리는 고려 탑, 서울 관악구
낙성대 삼층 석탑 — 강감찬이 태어난 곳을 기리는 고려 탑, 서울 관악구

Dreamline91 · CC BY-SA 4.0 · 원본

1018년 12월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자(거란의 3차 침입), 상원수 강감찬과 부원수 강민첨이 20만 8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맞섰다.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쇠가죽을 꿰어 냇물을 막았다가 적이 건널 때 터뜨리고, 숨겨 둔 기병으로 쳤다. 소배압은 곧장 개경으로 내려왔으나, 고려가 성 밖을 비우고 지키자(청야 전술) 개경 가까이에서 군사를 돌렸다.

1019년 2월 강감찬은 물러나는 거란군을 귀주 벌판에서 맞아 싸웠다. 싸움이 한창일 때 김종현이 이끄는 군사가 도착하고, 비바람이 남쪽에서 거란군 쪽으로 몰아치자 고려군이 크게 이겼다. 고려사는 살아 돌아간 거란군이 수천 명뿐이었다고 적었다.

이 승리로 993년부터 이어진 거란과의 전쟁이 끝났다. 고려는 강동 6주를 지킨 채 거란과 화친했고, 고려·송·거란 사이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강감찬의 건의로 개경에 나성을 쌓았고(1029), 북쪽 국경에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지도에서 보기

1019년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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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라와 지도자
고려 · 승전국 — 현종
거란 (요) · 침공국 — 성종

관련 인물

  • 강감찬948년 – 1031년

    지휘관 · 거란의 3차 침입 때 상원수로 귀주대첩을 이끌었다. 이후 개경에 나성을 쌓자고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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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관련 작품

각색한 작품(영화·드라마·소설)은 실제 역사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이 든 테마

  • 송·명과 일본의 무사 정권960년 – 1500년

    문치주의의 송이 요·서하·금에 세폐를 주며 강남 개발과 성리학을 꽃피우고, 원을 몰아낸 명이 황제 독재와 해금·조공 체제로 동아시아 질서를 다시 짠 시대 — 일본은 가마쿠라·무로마치 막부의 무사 정권을 거쳐 전국 시대로, 한반도는 고려에서 조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