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분쟁1619년 4월

사르후 전투

1619년 누르하치의 후금이 네 길로 쳐들어온 명군과 강홍립의 조선군을 사르후 일대에서 차례로 무찔렀다. 이 싸움으로 명과 후금의 형세가 뒤바뀌었다.

『만주실록』의 그림 「강홍립이 군사를 이끌고 항복하다」 —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에 항복하는 조선군 (원문에는 姜功立으로 적었다)
『만주실록』의 그림 「강홍립이 군사를 이끌고 항복하다」 — 사르후 전투에서 후금에 항복하는 조선군 (원문에는 姜功立으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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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이 푸순을 빼앗자 명은 1619년 양호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10만 명 안팎의 군대를 네 길로 나눠 후금의 도읍 허투알라로 보냈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명의 요구로 조선도 강홍립이 이끄는 1만 명 남짓을 보내 류정의 동로군에 붙였다.

누르하치는 "너희는 여러 길로 오지만 나는 한 길로 간다"며 팔기를 한데 모아, 사르후에서 두송의 서로군을 먼저 무찌르고 며칠 사이에 마림의 북로군과 류정의 동로군을 차례로 깨뜨렸다. 조선군은 부차(심하) 일대에서 크게 꺾였고 강홍립은 남은 군사와 함께 후금에 항복했다.

이 싸움으로 명과 후금의 형세가 뒤바뀌어, 후금은 1621년 랴오양·선양을 차지하고 랴오둥을 손에 넣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폈으나, 명을 받드는 서인이 인조반정(1623)으로 그를 몰아내고 친명배금을 내세우면서 후금의 침입(정묘호란)을 불렀다.

지도에서 보기

1619년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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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라와 지도자
후금 · 승전국 — 누르하치
명 · 패전국 — 만력제
조선 · 원군 — 광해군
관련 장소
사르후

관련 인물

  • 누르하치 (청 태조)1559년 – 1626년

    지휘관 · 건주 여진의 추장으로 여진을 통합해 1616년 후금을 세운 칸(재위 1616–1626). 팔기제와 만주 문자를 만들고 사르후 전투에서 명을 꺾었다

  • 강홍립1560년 – 1627년

    지휘관 · 광해군 때 명의 요청으로 후금 정벌에 나선 조선군의 도원수.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이 패하자 후금에 항복했다

  • 만력제 (명 신종)1563년 – 1620년

    군주 · 명의 황제(재위 1572–1620). 장거정이 죽은 뒤 오래 조정에 나오지 않았고, 임진왜란 파병 등 만력 3대 정벌과 사르후 패전으로 명이 기울었다

이 사건이 든 테마

  • 명·청과 에도 일본1500년 – 1800년

    북로남왜와 은 경제에 흔들린 명이 이자성의 난으로 무너지고, 만주의 청이 강희·옹정·건륭 3대에 가장 넓은 영토와 번영을 이룬 시대 — 일본은 전국 시대의 통일을 거쳐 에도 막부의 막번 체제와 쇄국으로, 조선은 두 차례 전쟁 뒤 통신사와 북학으로 이웃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