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1901년 9월 7일

신축 조약

다른 이름: 베이징 의정서, 신축 화약

1901년 9월 7일 청이 11개국과 맺은 조약. 은 4억 5천만 냥을 39년에 걸쳐 갚기로 해 이자까지 9억 8천만 냥이 넘었고, 베이징 공사관 구역과 베이징–바다 사이에 외국 군대를 두게 했다.

신축 조약 조인 — 1901년 9월 7일 베이징
신축 조약 조인 — 1901년 9월 7일 베이징

Alfons von Mumm · Public domain · 원본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서태후가 시안으로 피란한 가운데, 리훙장과 경친왕 혁광이 열강과 협상했다. 1901년 9월 7일 맺은 신축 조약으로 청은 의화단을 도운 대신들을 처벌하고, 다구 포대를 헐고, 베이징 공사관 구역에 외국 군대를 두며, 베이징에서 바다까지 철도 길목에 외국 군대가 머무는 것을 받아들였다.

배상금은 은 4억 5천만 냥, 당시 중국 인구 한 사람에 한 냥씩이었다. 39년에 걸쳐 연 4% 이자로 갚게 해 모두 9억 8천만 냥이 넘었고, 관세와 소금세가 담보로 잡혔다. 청 한 해 세입의 몇 배에 이르는 빚이었다.

조약을 맺고 두 달 뒤 리훙장은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베이징에 돌아온 서태후는 그제야 신정(新政)이라는 개혁에 나섰지만, 무거운 빚과 세금은 백성과 지방의 불만을 키웠다.

지도에서 보기

1901년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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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라와 지도자
청 · 체결국 — 광서제
영국 · 체결국
프랑스 · 체결국
러시아 · 체결국
독일 · 체결국
일본 · 체결국 — 메이지 일왕
관련 장소
베이징 공사관 구역

관련 인물

  • 리훙장1823년 – 1901년

    외교관 · 청의 북양 대신. 임오군란 뒤 조선 정책을 주도했고 이토 히로부미와 톈진 조약,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 서태후1835년 – 1908년

    관련자 · 함풍제의 비, 동치제의 어머니. 수렴청정으로 반세기 가까이 청의 실권을 쥐었고 무술정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이 든 테마

  • 청의 마지막 반세기1861년 – 1901년

    양무운동에서 신축 조약까지 — 서양의 기술을 배우려던 청이 프랑스와 일본에 거듭 지고, 열강에 땅을 쪼개 주고, 갚을 수 없는 배상금을 떠안은 4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