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 운동과 대기근
다른 이름: 대약진, 인민공사, 토법 고로, 중국 대기근, 3년 곤란 시기, 루산 회의
1958년 마오쩌둥이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겠다며 인민공사와 토법 제철로 대약진 운동을 벌였다. 부풀린 수확 보고 위에서 곡물을 거둬들이고 농사를 망쳐 1959–1961년 대기근이 일어났고, 사망자는 연구에 따라 약 1,500만–4,5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작자 미상 · Public domain · 원본
1958년 5월 공산당 제8차 대회 2차 회의는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 더 아껴"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총노선을 정하고,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했다. 8월 베이다이허 회의 뒤 몇 달 만에 전국의 농업 합작사가 2만 6,000여 개의 인민공사로 묶여 공동 식당을 열었고, 그해 철강 1,070만 톤 목표를 채우려고 농민 수천만 명이 마을의 작은 용광로(토법 고로)에서 냄비와 농기구까지 녹였다. 깊이갈이·빽빽이 심기 같은 비과학적 농법도 강요되었다.
지방 간부들은 경쟁적으로 수확량을 부풀려 보고했고, 국가는 그 숫자를 근거로 곡물을 거둬들이고 수출까지 했다. 1959년 7–8월 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편지로 문제를 지적하자, 마오쩌둥은 그를 "우경 기회주의"로 몰아 쫓아냈고 운동은 오히려 더 거세졌다. 1959년부터 1961년까지 대기근이 전국을 덮쳤고, 허난성 신양 같은 곳에서는 굶주림과 폭력으로 특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
사망자(평상시보다 더 죽은 사람)는 연구에 따라 크게 다르다. 인구학자들의 추정은 대체로 1,500만–3,000만 명이고, 기자 양지성은 『묘비』에서 약 3,600만 명, 역사학자 프랑크 디쾨터는 4,500만 명으로 보았다. 중국 정부는 이 시기를 "3년 곤란 시기"라 부른다. 1962년 1월 7천인 대회에서 류사오치는 재난이 "3할은 하늘 탓, 7할은 사람 탓"이라고 말했고, 이후 류사오치·덩샤오핑의 조정 정책으로 경제가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