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 운동과 반우파 투쟁
다른 이름: 백화제방 백가쟁명, 쌍백 방침, 반우파 운동, 반우파 투쟁, 우파 분자
1957년 봄 공산당이 "백화제방·백가쟁명"을 내걸고 지식인에게 당을 비판하라고 권했다. 비판이 거세지자 6월부터 반우파 투쟁으로 돌아서, 공식 집계로 55만여 명이 "우파"로 몰려 직장을 잃거나 노동 개조소로 보내졌다.

마오쩌둥은 1956년 5월 "백 가지 꽃이 함께 피고 백 개의 학파가 함께 다툰다"(백화제방·백가쟁명)는 방침을 내놓았고, 1957년 2월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하여" 연설에 이어 4월 말 당의 관료주의·종파주의·주관주의를 바로잡는 정풍에 당 밖의 비판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5월부터 민주 당파 지도자와 대학 교수·학생의 비판이 쏟아졌고, 베이징 대학에는 대자보로 뒤덮인 "민주의 벽"이 생겼다. 비판은 공산당의 일당 지배 자체로까지 나아갔다.
6월 8일 『인민일보』의 사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신호로 반우파 투쟁이 시작되었다. 당 총서기 덩샤오핑이 실무를 맡은 이 운동에서 공식 집계로 55만 2,877명이 "우파 분자"로 분류되었고(실제는 더 많았다는 연구도 있다), 많은 사람이 공직과 교직을 잃고 노동 교양소와 변방의 농장으로 보내졌다.
반우파 투쟁 뒤 지식인은 입을 다물었고, 이는 이듬해 대약진 운동의 무리한 목표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게 만든 한 원인으로 꼽힌다. 우파 판정은 1978–1980년 대부분 바로잡혔으나 장보쥔·뤄룽지 등 몇 사람은 끝내 복권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