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1871년 12월 23일 – 1873년 9월 13일

이와쿠라 사절단

다른 이름: 이와쿠라 구미 사절단, 정한론 정변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 절반이 1년 9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을 돌며 불평등 조약 개정을 타진하고 서양의 제도·산업을 살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지도자들 —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나오요시,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1872년
이와쿠라 사절단의 지도자들 — 왼쪽부터 기도 다카요시, 야마구치 나오요시,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1872년

작자 미상 · Public domain · 원본

1871년 12월 이와쿠라 도모미를 대사로, 기도 다카요시·오쿠보 도시미치·이토 히로부미 등 정부 핵심과 유학생을 합쳐 100명 남짓이 요코하마를 떠났다. 미국에서 조약 개정을 꺼냈으나 거절당하자,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 등을 돌며 의회·공장·학교를 살피는 데 힘을 쏟았다. 1873년 9월 돌아온 이들은 국력부터 기르자며, 그 사이 남은 정부(사이고 다카모리·이타가키 다이스케 등)가 결정한 조선 사절 파견(정한론)을 뒤집었다. 사이고·이타가키는 정부를 떠났다. 조선이 1881년 일본에 보낸 조사 시찰단도 이와 같은 시찰단이었다.

지도에서 보기

1871년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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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라와 지도자
일본 — 메이지 일왕

관련 인물

  • 이와쿠라 도모미1825년 – 1883년

    외교관 · 조정의 귀족으로 왕정복고를 이끈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 1871–1873년 구미 사절단의 전권 대사였다

  • 오쿠보 도시미치1830년 – 1878년

    외교관 · 사쓰마 출신으로 메이지 정부를 이끈 정치가. 폐번치현과 식산흥업을 밀었고, 정한론에 반대했다

  • 이토 히로부미1841년 – 1909년

    참여자 · 일본의 첫 총리대신.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초대 한국 통감이 되었다.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했다

  • 사이고 다카모리1828년 – 1877년

    관련자 · 사쓰마 출신의 메이지 유신 지도자. 정한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러났고,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해 죽었다

앞뒤 사건

이후 사건
1874년 자유 민권 운동

이 사건이 든 테마

  • 동아시아의 개항과 근대화1839년 – 1901년

    아편 전쟁에서 신축 조약까지 — 서양의 함포 앞에 문을 연 청·일본·조선이 저마다 개혁에 나섰다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진 6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