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분쟁1911년 10월 18일 – 12월 2일

양샤 전투

다른 이름: 양하 전투, 한양 전투, 한커우 전투

1911년 10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청이 다시 불러낸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이 한커우와 한양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사이 남쪽과 서쪽의 성들이 잇달아 청에서 떨어져 나갔고, 12월 2일 혁명군이 난징을 차지했다.

우창에서 장강을 건너 싸우러 가는 혁명군 — 1911년
우창에서 장강을 건너 싸우러 가는 혁명군 — 1911년

작자 미상 · Public domain · 원본

우창 봉기에 놀란 청 조정은 북양군을 보내는 한편, 2년 전 내쫓은 위안스카이를 다시 불러냈다. 북양군은 10월 말 한커우에 들어와 거리를 불태웠고, 위안스카이는 11월 1일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군과 정부를 함께 쥐었다. 황싱이 지휘한 혁명군은 한양을 지키려 싸웠으나 11월 27일 한양마저 빼앗겼다.

그러나 그사이 후난·산시(陝西)·장시·산시(山西)·윈난·상하이·구이저우·저장·장쑤·광시·안후이·푸젠·광둥·쓰촨이 차례로 청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12월 2일에는 장쑤·저장 연합군이 난징을 차지했고, 12월 1일 외몽골도 청에서 떨어져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우창을 코앞에 둔 위안스카이는 진격을 멈추고 혁명파와 휴전했다. 청을 무너뜨리는 대가로 새 나라의 대총통 자리를 얻어 내려는 셈이었다. 12월 18일 상하이에서 남북 협상이 시작되었다.

지도에서 보기

1911년의 지도

OpenFreeMap © OpenMapTiles © OpenStreetMap contributors

당시 나라와 지도자
청 — 선통제
관련 장소
한커우, 우창, 난징

관련 인물

  • 위안스카이1859년 – 1916년

    지휘관 · 청 말의 북양군 실력자로, 임오군란 뒤 조선에 머물며 내정에 간섭했다. 신해혁명 때 청 황제를 퇴위시키고 중화민국 대총통이 되었으나 독재 끝에 황제가 되려다 실패했다

  • 황싱1874년 – 1916년

    지휘관 · 후난 출신의 혁명가. 화흥회를 만들고 쑨원과 함께 중국 동맹회를 이끌었으며, 1911년 광저우 봉기와 한양 방어전을 지휘했다

  • 리위안훙1864년 – 1928년

    참여자 · 후베이 신군의 협통(여단장). 1911년 우창 봉기 뒤 혁명군에 떠밀려 후베이 군정부 도독이 되었고, 뒤에 중화민국 부총통·대총통을 지냈다

앞뒤 사건

이전 사건
1911년 우창 봉기
이후 사건
1912년 선통제 퇴위

이 사건이 든 테마

  • 신해혁명1894년 – 1916년

    흥중회에서 위안스카이의 죽음까지 — 빚과 개혁 실패 속에 혁명가와 신군이 청을 무너뜨리고 아시아의 첫 공화국을 세웠지만, 공화국은 독재와 황제 놀음을 거쳐 군벌의 시대로 들어간 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