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의 난과 명의 멸망, 청의 입관
다른 이름: 명의 멸망, 청의 입관, 산해관 전투, 변발령
1644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숭정제가 목숨을 끊어 명이 멸망했다. 곧 오삼계가 산하이관을 열어 청군이 들어와 이자성을 몰아내고 베이징을 도읍으로 삼았다.

そらみみ · CC BY-SA 4.0 · 원본
17세기 초 명은 만력제 뒤의 당쟁(동림당과 환관 위충현의 다툼), 후금과의 전쟁에 드는 요향 같은 세금의 증가, 거듭된 가뭄과 기근으로 흔들렸다. 1620년대 말 산시(섬서)에서 굶주린 농민과 군사가 들고일어나 반란이 번졌고, 그 가운데 이자성은 토지를 고르게 나누고 세금을 거두지 않겠다는 구호(균전면량)로 무리를 모았다. 1644년 시안에서 대순을 세운 이자성은 그해 4월 베이징을 점령했고, 숭정제가 자금성 뒤 메이산(경산)에서 목숨을 끊어 명은 멸망했다.
산하이관에서 청을 막던 명의 장수 오삼계는 이자성에게 항복하지 않고 청에 손을 내밀었다. 섭정왕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은 오삼계와 함께 산하이관 싸움에서 이자성을 무찌르고 6월 베이징에 들어갔으며(입관), 어린 순치제를 맞아 도읍을 선양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병자호란 뒤 선양에 볼모로 가 있던 조선의 소현 세자도 이때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들어가 아담 샬과 사귀었다.
청은 명의 제도와 과거를 이어받아 한인 관리를 쓰는 한편, 1645년 변발령을 내려 한인 남자에게 만주식 머리 모양을 강요했다. 남명 정권과 정성공 세력이 저항했으나 1662년 남명의 마지막 황제가 죽고 1683년 타이완이 항복하면서 청의 중국 지배가 굳어졌다. 조선에서는 명을 위해 복수하자는 북벌론과, 명이 망한 뒤 조선만이 중화를 잇는다는 조선 중화 의식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