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935 – 943년

태조의 정책과 훈요 10조

왕건은 호족을 끌어안으면서 견제하는 정책과 북진 정책을 펴고, 죽기 전 후대 왕들에게 훈요 10조를 남겼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지방 호족을 끌어안았다. 여러 호족의 딸과 혼인해 왕비가 29명이었고, 공을 세운 호족에게 왕씨 성을 내렸으며(사성 정책), 940년에는 공로에 따라 역분전을 나누어 주었다. 한편으로는 사심관 제도(935, 신라 경순왕을 경주 사심관으로 삼은 것이 처음)와 기인 제도(호족의 자제를 개경에 머물게 함)로 호족을 견제했다. 백성에게는 "취민유도"를 내세워 세금을 수확의 10분의 1로 낮추고 흑창을 두어 가난한 백성을 도왔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에서 따 "고려"라 하고, 옛 고구려의 도읍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북진의 기지로 삼았다. 발해가 거란에 망하자 세자 대광현 등 유민을 받아들였고, 942년 거란이 보낸 낙타 50필을 만부교 아래에 매어 굶겨 죽이고 사신을 섬으로 귀양 보냈다(만부교 사건). 국경은 청천강에서 영흥 일대까지 넓어졌다.

943년 태조는 박술희를 통해 훈요 10조를 남겼다. 불교를 숭상하되 사찰을 함부로 짓지 말 것, 연등회·팔관회를 소홀히 하지 말 것, 거란은 "금수의 나라"이니 본받지 말 것, 서경을 중시할 것 등을 당부했다. 관리가 지킬 도리를 적은 "정계"와 "계백료서"도 지었다.

지도에서 보기

935년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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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라와 지도자
고려 — 태조 왕건
관련 장소
송악 (개성), 평양성

관련 인물

  • 태조 왕건877년 – 943년

    군주 · 송악의 호족 출신. 궁예 밑에서 나주를 차지하는 등 공을 세웠고,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935–936년 후삼국을 통일했다

앞뒤 사건

이전 사건
935년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사건
940년 역분전 지급

이 사건이 든 테마

  • 수취 제도의 변천755년 – 1894년

    조세·공납·역에서 갑오개혁의 금납화까지 — 땅에 매기는 세금이 늘고 사람·집에 매기는 부담이 줄어든 흐름

  • 지방 행정 제도의 변천250년 – 1896년

    5부·5방·5주에서 9주 5소경, 5도 양계, 8도를 거쳐 13도까지 — 중앙이 지방을 얼마나 직접 다스리게 되었나

  • 평양기원전 194년 – 2007년

    고조선 왕검성에서 남북 정상 회담까지 — 고구려의 도읍이자 고려의 서경, 대동강 가의 북쪽 중심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