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1742년

탕평비 건립

영조가 붕당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쓰겠다는 뜻을 성균관 앞 비석에 새겼다.

성균관 앞 탕평비 — 1742년
성균관 앞 탕평비 — 1742년

Motoko C. K. · CC0 · 원본

숙종의 환국과 경종 때의 신임옥사로 붕당 다툼이 극에 달했고, 영조 즉위 뒤 이인좌의 난(1728)까지 일어났다. 영조는 탕평 교서를 내려 탕평파를 키우고, 붕당의 근거지가 된 서원을 대거 정리했으며, 이조 전랑의 후임자 추천권을 없앴다.

탕평비에는 "두루 사귀되 편당 짓지 않는 것은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요, 편당 짓되 두루 사귀지 않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생각이다"라고 새겼다. 강한 왕권으로 붕당을 누른 데 그쳐 다툼의 뿌리를 없애지는 못했고, 탕평은 정조에게 이어졌다.

지도에서 보기

1742년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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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라와 지도자
조선 — 영조
관련 장소
성균관

관련 인물

  • 영조1694년 – 1776년

    주도자 · 조선 제21대 왕. 탕평책과 균역법을 폈고,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했다

앞뒤 사건

이전 사건
1734년 정선의 금강전도
이후 사건
1746년 속대전 편찬

이 사건이 든 테마

  • 붕당 정치의 전개1498년 – 1863년

    사화에서 세도 정치까지 — 사림의 붕당이 공존과 견제에서 환국·일당 전제로, 탕평을 거쳐 몇 가문의 독점으로 바뀐 길

  • 종교 개혁과 절대 왕정1517년 – 1796년

    루터의 95개조에서 예카테리나 2세까지 — 갈라진 크리스트교 세계의 종교 전쟁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나고, 왕권신수설·상비군·관료제·중상주의를 앞세운 절대 왕정과 동유럽의 계몽 전제 군주가 주권 국가의 세력 균형을 다투던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