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
여섯 형제가 재산을 처분하고 서간도로 옮겨 경학사와 신흥 강습소를 세웠다
호는 우당. 백사 이항복의 후손인 서울 명문가에서 이조 판서 이유승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신분을 가리지 않는 생각을 지녀 집안의 노비를 풀어 주었다고 전한다.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과 신민회를 만들었고, 헤이그 특사 파견에도 이상설과 함께 뒤에서 힘을 보탰다.
국권 피탈 뒤 이석영·이시영 등 여섯 형제가 많은 재산을 처분하고 가족 수십 명과 함께 서간도 삼원보로 옮겼다. 1911년 이상룡 등과 경학사를 세우고, 독립군을 기를 신흥 강습소(뒤의 신흥 무관 학교)를 열었다. 1918년에는 고종을 베이징으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의 구심으로 삼으려 했으나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이루지 못했다.
뒤에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1924년 재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만들고 베이징·상하이에서 의열 투쟁을 도왔다. 형제들의 재산이 다해 가족은 끼니를 거르는 일이 많았다. 1932년 만주에 연락 근거지를 세우려고 가던 중 다롄에서 붙잡혀 뤼순 감옥에서 고문을 받다 11월 17일 예순다섯 살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