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경제·문화 운동
물산 장려·민립 대학 설립 운동, 소작 쟁의와 노동 쟁의, 형평·소년·여성 운동, 6·10 만세 운동·신간회·광주 학생 항일 운동, 국학 연구와 한글 운동
이 테마는 한국사의 흐름을 지도로 익히도록 돕는 참고용입니다. 시험 범위·출제 경향과 다를 수 있으니, 실제 시험 준비는 교과서와 검증된 교재로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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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대종교·불교·천주교·원불교·개신교 등 종교계가 계몽 운동, 무장 투쟁, 생활 개선 운동, 신사 참배 거부로 민족 운동에 나섰다.
박은식이 상하이에서 "한국통사"를 펴내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과정을 밝혔다. 민족의 "혼"을 지키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했다.
조만식 등이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만들어 우리 손으로 만든 물건을 쓰자는 운동을 벌였다. 1923년 서울에서 전국 조직이 생겨 널리 퍼졌다.
이상재 등이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를 만들어 한국인 손으로 대학을 세우려고 모금 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다.
백정들이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만들어 신분 차별을 없애고 평등한 대우를 받으려는 형평 운동을 벌였다.
방정환 등 천도교 소년회와 색동회가 어린이를 한 인격으로 대하자는 소년 운동을 벌였다. 1923년 5월 1일 조선 소년 운동 협회가 어린이날 기념식을 열고, 잡지 "어린이"를 펴냈다.
전남 신안 암태도의 소작인들이 1년 가까이 싸워 지주 문재철에게서 소작료를 7~8할에서 4할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전국의 청년 단체들이 조선 청년 총동맹으로 모였다.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청년 운동이 민족 운동·사회 운동과 이어졌다.
서울에서 조선 공산당이 비밀리에 결성되었으나, 그해 11월 신의주 사건으로 드러나 치안 유지법에 따라 많은 당원이 붙잡혔다.
순종의 장례일에 학생들이 격문을 뿌리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손잡는 계기가 되었다.
나운규가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무성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해 큰 인기를 얻었다. 식민지 민중의 울분을 담은 한국 영화의 대표작이다.
3·1 운동 민족 대표였던 승려 한용운이 시집 "님의 침묵"을 펴냈다. 잃어버린 "님"을 기다리는 노래로 민족의 독립 의지를 담았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손잡고 신간회를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최대의 합법적 민족 운동 단체였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들이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근우회를 만들었다. 여성 차별 철폐와 여성의 단결을 내걸고 전국에 지회를 두었다.
원산의 노동자들이 일본인 감독의 한국인 노동자 폭행에 맞서 4개월 가까이 총파업을 벌였다. 1920년대 최대의 노동 쟁의다.
광주에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을 계기로 일어난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다.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운동이다.
동아일보가 방학 때 학생들을 농촌에 보내 한글을 가르치고 미신 타파·생활 개선을 알리는 브나로드 운동을 벌였다.
신채호가 쓴 "조선상고사"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보고 고대사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조선어 연구회를 이은 조선어 학회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정하고 우리말 사전 편찬을 준비했다.
이병도·손진태 등이 진단 학회를 만들어 "진단 학보"를 내며 문헌 고증에 바탕한 실증 사학을 폈다. 같은 무렵 정인보·안재홍의 조선학 운동, 백남운의 사회 경제 사학이 나왔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의 사진을 실으며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가슴의 일장기를 지웠다. 총독부는 동아일보를 무기 정간하고 기자들을 잡아들였다.
1446년 간행한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되어, 한글을 만든 원리가 처음 밝혀졌다.
일제가 조선어 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몰아 회원들을 잡아 가두었다. 이윤재·한징이 옥중에서 숨지고 학회는 해산되었다.
일제 말 민족 말살 정책 속에서도 저항시를 쓴 이육사가 1944년 베이징의 감옥에서, 윤동주가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