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고인돌에서 강화도 조약까지 — 고려의 임시 수도에서 개항의 무대까지, 나라가 위기 때마다 기댄 섬

ChongDae · CC BY-SA 3.0 · 원본
고인돌에서 강화도 조약까지 — 고려의 임시 수도에서 개항의 무대까지, 나라가 위기 때마다 기댄 섬

ChongDae · CC BY-SA 3.0 · 원본
| 시대 | 사건 | 내용 |
|---|---|---|
| 청동기 | 강화 고인돌 | 부근리 탁자식 고인돌, 세계 유산 |
| 고려 | 강화 천도 | 최우, 몽골에 맞선 장기 항전 |
| 고려 | 상정고금예문 | 금속 활자로 인쇄(동국이상국집 기록) |
| 고려 | 팔만대장경 조판 | 대장도감, 부처의 힘으로 몽골 격퇴 염원 |
| 고려 | 삼별초의 항쟁 | 개경 환도 반대, 배중손 → 진도·제주 |
| 조선 | 정묘호란 | 인조 강화도 피란, 형제의 맹약 |
| 조선 | 병자호란 | 왕실 피란, 강화도 함락 |
| 조선 후기 | 강화학파 | 정제두, 양명학 연구 |
| 조선 후기 | 외규장각 | 정조(1782), 어람용 의궤 보관 |
| 개항기 | 병인양요 | 병인박해 구실, 양헌수(정족산성), 의궤 약탈 |
| 개항기 | 신미양요 | 제너럴셔먼호 구실, 어재연(광성보) |
| 개항기 | 운요호 사건 | 초지진 포격, 영종도 공격 |
| 개항기 | 강화도 조약 | 첫 근대 조약, 부산 등 3항 개항·치외 법권 |
| 현대 | 외규장각 의궤 반환 | 박병선 발견, 145년 만에 귀환(2011) |
비파형 동검과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식 토기가 요령 지방과 한반도 북부에 퍼졌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보여 주는 유물이다.
최우가 몽골의 간섭에 맞서 장기 항전을 하려고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고려 조정은 1270년까지 39년 동안 강화도에 머물렀다.
강화도로 옮긴 뒤 의례서 상정고금예문 28부를 금속 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전한다. 책은 남아 있지 않다.
몽골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기를 바라며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두고 16년 동안 대장경판 8만여 장을 새겼다. 지금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개경 환도에 반대한 삼별초가 배중손의 지휘로 강화도에서 봉기해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 가며 3년 동안 고려·몽골 연합군에 맞섰다.
후금이 3만 군으로 쳐들어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했고,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버티다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양명학자 정제두가 강화도로 옮겨 제자를 길렀다. 그의 제자와 후손이 강화학파를 이루었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창덕궁 후원에 왕실 도서관이자 학문·정책 연구 기관인 규장각을 세웠다.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했다. 양헌수가 정족산성에서 물리쳤고, 프랑스군은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 물러났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따지러 온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했다. 광성보에서 어재연이 전사했고,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웠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초지진에 다가와 포격을 주고받고 영종도에 상륙해 약탈했다. 일본은 이를 구실로 강화도 조약을 강요했다.
1876년 음력 2월 3일(양력 2월 27일) 조선이 일본과 맺은 첫 근대 조약. 부산 등 세 항구를 열었고 불평등 조항이 담겼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궤 297책이 145년 만에 돌아왔다.



